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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 단순한 열정

by raumkim 2020.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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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20대 초반에 사랑에 빠졌었다. 일방적인 마음이었고, 그 마음이 흐르고 넘쳐 나를 잠식하는 것이 싫었다. 정정해야겠다. 싫었다기 보다는 정말로 힘들었었다. 그래서 장문의 글에 내 마음을 다 씼어냈고, 그것은 그 남자에게로 갔다. 

 

 지금 나는 그때의 마음을 웃으며 '고마운 기억'이라고 말한다. 그 당시 나는 나의 한계를 넘어 섰다고 확신했다. 길게 산 인생은 아니지만, 인생을 살면서 나의 한계를 맛보는 이유가 '사람을 향한 마음'이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은 그 때, 아주 뜨거워서 내 몸을 불태울 것 같았던 20대의 나날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다만 소설 속 주인공이 20대가 아닌 장성한 아들들을 둔 중년의 여성이라는 점이 나와는 달랐다. 사랑에 나이가 중요하겠냐만은 소설 속 주인공의 사랑을 대하는 태도는 정말이지 놀라웠다. 복잡한 로직이 없다. 그저 '그=나의 삶'이라는 등식만 존재할 뿐. 이러한 맥락에서 제목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지었다. '단순한' 열정이라니.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66)


 

 이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 대부분을 '이렇게 미련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있느냐, 뭐 좋은 남자라고 유부남을' 이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말미에 나온 위의 글은 작가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 독자에게 던지는 일갈이라고 본다.

 사랑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 할 때 가장 하기 쉬운 말은 '정신 차려! 네 인생 살아야지!'인 것 같다.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가장 힘든 것도 '나'지만 가장 행복한 것도 '나'이다. 작가는 당시의 사랑을 '그 남자'에게 초점을 두지 않고, 오로지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세세하게 소설에서 풀어쓴다. 우리가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하여도 상관없다. 아니 에르노는 그저 그 사람이 그녀에게 보여준 것(조금 더 보태자면 그녀가 본 것)을 써내려갔을 뿐이다. 이러한 사랑이야 말로 주체적인 사랑 아닌가. 

 

 

 아니 에르노는 끝까지 날카로운 문장으로 독자의 비수를 꽂는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67)'라니. 어쩌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는 것이 사치가 되어버렸을까, 우리는 대체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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