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늘 압도적인 일인칭으로 벌어진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압도적 현재형으로, 다른 인칭들, 다른 시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p.137)
10대의 소년이 40대의 여성을 사랑하게 된다. 그것도 아주 열렬히. 10대의 폴은 어린시절의 아픔을 그대로 지닌 채,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수전을 구하고자 한다. 그렇게 그들은 런던에 작은 집을 구하고, 빌리지에서 그 둘만의 공간으로 도망친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다 괜찮은 듯했다. 폴과 수전은 여전히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고, 또 서로를 원하고 있었다. 10대의 폴, 그리고 20대의 폴은 그녀와의 사랑이 온전한 것으로 우주를 얻은 듯이 행복해했고, 만족했다. 수전 역시 그럴 것이라고 내심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상은 두 사람 모두 현실의 남루함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랜 기간 사랑을 하던 두 사람은, 그 중에서도 폴은 자신의 감정과 그것의 수신자였던 수전을 조금씩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은 수전과의 사랑이 현실에서 쉬이 발견되지 않는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본다. (너는 그녀가 어떤 규칙도 아니기를, 예외 같은 것이기를 바란다.(p. 220))
그러나 폴은 이전보다 "더 평범한 표현을 사용(234)"해서 수전에게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천천히 그리고 점점 식고 초라해진다. 그런 변화를 먼저 느낀건 폴의 사랑을 받던 수전이었다. 수전은 그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술을 선택한다. 여기서 인생의 아이러니는 더욱 부각되어 나타난다. 어린 시절 그녀를 성폭행한 삼촌도 그녀를 수시로 폭행한 남편도 모두 술에 취한 상태였다. 전에게 술은 이미 ‘닳을 대로 닳아버린’ 자신을 만들어낸 요소들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술을 통해 완전한 파멸의 길로 스스로 걷는 수전의 모습은 인생의 처연함이 부각되어 보이게 한다.
나쁜 사랑은 여전히 좋은 사랑의 잔재, 기억을 포함하고 있었다-어딘가, 깊은 곳, 그들 둘 다 더는 파헤치고 싶지 않은 곳에.(342)
이제 소설 속에서 폴은 목소리를 잃는다. 이제 누군지 모를 이가 관찰자가 되어 폴과 수전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그 관찰자는 10대 혹은 20대의 폴을 바라보는 나이 든 풀 일 것이다. 사랑이 모두 끝난 후에 우리는 그렇게 된다. 그제서야 앞서 줄리언 반스의 말처럼 다른 인칭도, 다른 시제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외적이고, 위반적이며 절대적이었던 사랑은 그것이 ‘그러하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그 순간들에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난 뒤, 그것이 ‘기억’이 되고 그것을 다시 쓰다 보면 보지 못했던 남루하고 초라한 사랑의 잔상이 남는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은 진실인 동시에 거짓이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사랑만 그러한가.
'책과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넷플릭스 추천 미드] 여주 대활약 드라마들 - 에밀리 파리에 가다, 그레이스 앤 프랭키 (0) | 2021.03.29 |
---|---|
[남의 마음을 흔드는 건 다 카피다] 좋은 "자기계발서"로 임명합니다. (0) | 2021.03.27 |
편혜영 - 홀 (0) | 2020.04.09 |
dfdcd (0) | 2020.04.08 |
앤드루 포터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1) | 2020.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