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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실 잣는 여인들, 에우로파의 강탈 그리고 아라크네 신화

by raumkim 2022.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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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도 미술관

 

스페인 3대 화가로 꼽히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 중 하나인 <실 잣는 여인들>은 얼핏보면 잠언 31장에 언급된 여성의 덕목, 그러니까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 손으로 손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으며 (...) 그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이불을 짓는" 여성들을 보여줌으로써 보는이로 하여금 '교훈'을 심어주려는 듯 하다. 

 

그런데 이 그림은 총 세 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프라도 미술관

<실 잣는 여인들>은 전경과 후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후경에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겹쳐져 있다. 후경에 걸려있는 테피스트리에 그려진 두 가지 이야기는 모두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나온 것으로 하늘에 떠있는 큐피도와 붉은 천이 휘날리는 부분이 "에우로페의 강탈"을, 그 왼쪽에 어깨와 가슴을 활짝 연 당당한 여성과 방패와 투구를 쓴 여성이 그려진 부분은 "아라크네 신화"를 나타낸다. 그림 속에 그림 속에 그림의 형식을 나타내는 <실 잣는 여인들> 속 그림들은 서로 얽혀 있다. 

 

제주일보

 

티치아노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 펠리페 2세의 주문으로 <에우로파의 강탈(위 그림)>을 그린다. 페니키아의 공주였던 에우로페를 사랑하게 된 제우스는 황소로 변신하여 그녀를 '강탈'한 뒤 강을 건넌다. 에우로페는 황소의 한쪽 뿔을 부여잡은 채, 하늘에 있는 '큐피도'를 쳐다본다. 티치아노의 작품을 포함하여 "에우로파의 강탈"을 담은 그림들은 모든 유럽 군주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는 여인을 강탈하는 등의 전지전능한 권력을 뽐내는 제우스와 자신을 동일시 하려는 야심을 드러내는 행위였다.

 

한편, 벨라스케스의 <실 잣는 여인들> 속 "에우로페의 강탈"은 당시 역사적 상황과 맞물려 색다른 해석을 만들어냈다. <실 잣는 여인들>의 작업이 진행되던 시절 펠리페 4세의 딸 마리아 테레사 공주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11년간의 지난한 프랑스-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한 직후에 벌어진 일이다. 당시 후세가 없었던 펠리페 4세는 자신의 딸을 볼모로 프랑스가 자신의 왕조를 넘볼까봐 마리아 테레사 공주를 프랑스 왕실로 보낼때 50만 에스쿠도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참금을 함께 보냈다고 한다. 프랑스 왕실은 이에 대한 대가로 마리아 테레사의 스페인 왕실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위 그림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마리아 테레사 공주가 '에우로페'이고 그녀를 그녀의 고향에서 강탈해가는 '황소'가 당시 유럽 패권을 잡기 시작한 프랑스의 루이 14세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프라도 미술관

 

그리스 로마 신화 "에우로페의 강탈"은 제우스은 화려한 여성 편력을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실 잣는 기술이 뛰어나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던 아라크네는 지혜의 신 아테네가 와도 이길 자신이 있다고 말하고 다닌다. 이에 격분한 아테네가 아라크네와 직조술로 경쟁한다. 아라크네는 "에우로페의 강탈"을 포함하여 신들의 불미스런 행위들을 다룬 직조물을 만들고, 이에 격분한 아테네는 그녀를 거미로 바꾼다. 그림 속에서 아직은 사람의 형상을 띄고 있는 아라크네에게 왼쪽 상단에서 빛이 떨어진다. 이 빛은 아테네가 오만한 인간 아라크네에게 내린 형벌이 주어지는 순간을 표현하는 듯 하다.  

 

위키피디아

 

전경에서 실 잣는 여성들이 만든 작품이 후경에 걸린 아라크네 신화와 에우로페의 강탈이 담긴 테피스트리라고 가정해보자. 펠리페 4세의 예쁨을 독차지하며 왕궁 곳곳을 열 수 있는 자격 혹은 지위를 얻는 데 평생을 바칠만큼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야망에 찬 사람이었다. 그는 그림의 구석에 흐릿하게 아라크네 신화를 담아냄으로써, 자신의 기술을 통해 신에게 도전한 아라크네처럼 현실 속 자신의 기술(실 잣는 여인들의 기술처럼)도 신에게 도전할 만큼 값지다는 것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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