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먹어가는데 직업도 없이 책이 좋아 공부를 시작한 딸은, 조금 돈이 모일라치면 "엄마 나 다음달에 어디가"라고 갑작스레 말을 해왔습니다. '언제쯤 정신차리려나' 싶다가도, 요즘 텔레비전에 젊은 연예인이 나와 외치는 "YOLO"인가 하는거에 내 딸도 홀려 있는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싸돌아 다녀야 하냐고 묻자, 딸은 "나도 좀 쉬어야, 다음 일을 하지. 너무 힘들다."라는 내가 듣기에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합니다. 그저 나는 나의 딸이 또래의 아이들 처럼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조금은 안정적인 삶을 꾸렸으면 할 뿐인데 말이죠.
삶의 안정감이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 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것. 보통은 한곳에 정착하며 아는 사람들과 오래 살아가야만 안정감이 생긴다고 믿지만 이 인물은 그렇지가 않아요.
여행의 이유, 김영하, p. 60
무심코 읽어내려가다가, 위 문장에서 울컥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와 유사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에게 이 글을 보내주니,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이란다. 나에게 삶의 안정감은 내가 어디에 있고, 누구와 있고가 결정하는 것은 아닌듯 하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내가 공간과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 혹은 그들이 내게 주는 감정에 따라서 변화한다.
김영하 작가는 9개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떠나고 싶은 사람은 설령 그것이 도망이라 할지언정 떠나야 한다." 혹은 "떠나도 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망이라도 할지언정'인데, 기성 세대가 젊은 세대의 여행을 두고 왈가왈부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이것이지 않은가. "지금 현실에 여행이 가당키나 하냐, 현실을 도피하지말아라."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다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여행의 이유, 김영하, p. 51
예상은 했지만, 김영하 작가의 여행 에세이는 여행을 '찬양'하는 글은 아니다. 신문 기사, 여행 책 요즘은 유트브만 봐도 많은 돈과 시간 그리고 노력을 들이지 않은채 여행할 수 있다. 여행을 해 본 누구나 한번쯤은 가지고 있을 법한 생각이다. 여행이라고 가서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 네이버에 '파리 여행'만 쳐봐도 알 수 있다. 엄청난 로망을 가지고 떠난 파리는 생가가생ㄱ
생각보다 좋지 않다는 글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던 여행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를 끊임없이 흔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굳이 단어로 표현할 필요도 없고, 실은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여행이라는게, '언어'로 다 표현되지 않기도 하니 말이다.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의 이유, 김영하, p. 179
위 문장에서 여행을 사랑으로 바꾸어 읽어보니, 나는 꽤나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사랑도 그러하지 않은가. 알랭드 보통의 말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사랑도 여행처럼 나 혹은 일상 나의 나
에서 부족한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 시작한다. 그리고 사랑을 하는 것 역시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먼 길을 떠나는 것과 비슷하다. 무엇보다 사랑은 '쉽게' 쟁취할 수도 없을 뿐더러, 가끔은 '나'라는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경험을 하게 하는 점에서 여행과 다를바가 없다.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른 여행이 될까봐 혹은 남에게 도망같아 보일까봐 더 나아가서는 언제까지 이렇게 떠돌아다니며 살 수는 없으므로라는 이유에서 여행을 망설이고 있는 이에게 김영하는 "여전히 떠나야 할 것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면" 떠나라고 말한다.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귀환의 원점이라는 것은 일종의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르다는 의미 아닐까. 돌아와야 하는 나의 나라, 나의 집이 물리적으로는 존재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디론가 떠나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전제한 조건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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