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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떠나는 여행(국)

[서촌/인왕산] 인왕산 산책길이라고 했는데 왜 등반같지

by raumkim 2020.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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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일요일, 우리는 데이트를 하기로 하고 어딜갈지를 고민했다. '한강에 갈까?'하고 제안하니 '한강에 사람 차고 넘친대'라고 남자친구가 말한다. 아 그럼 안되지, 다 지키기는 못해도 사회적 거리두기는 고려해야지. 그러다 만남 직전에 경복궁 옆에 있는 인왕산 산책길이라는 제목의 포스팅을 본다. '산책길이란 말이지?'하고 호기롭게 남자친구에게 '옷 편하게 입고나와~'라고 카톡한다. 

 

날씨가 참 좋았다

 

 지난 일요일 날씨가 참 좋았다. 청바지에 봄 후드티를 입고 나갔는데, 조금 걸으니 기분 좋게 땀이 날 정도였다.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라고 하기엔 1인용 피자 한 판씩을 끝내고), 인왕산 등산을 시작했다. 인왕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여러가지가 있는 듯 하다. 우리는 3호선 경복궁역에서 시작했다. 

 조금 오르니 숨이 차고, 조금 더 오르니 '산책'이라고 표현했던 블로거를 원망하게 된다. 남자친구는 '네가 운동부족이어서 그래'라고 하는데, 그마저도 짜증나서 입을 꼬매버리고 싶다. 

 

 

 

 오르는 길목마다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서울의 전경을 즐기며 쉴 수 있는 공간이 많아서 좋았다. 삼삼오오 모여 아침에 부랴부랴 만들어오거나 사온 김밥 혹은 도시락을 열어서 먹고 있었다. 얼마나 꿀맛일까. 피자 먹은지 얼마 안됐는데 왜 나는 배가 고플까. 와 같은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산을 오른다.

 

 

 나는 높은 곳을 좋아한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많으니까 '내 인생에서 가장 불행했던 시간들'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힘에 부친다는 생각을 매일했던 고등학생 시절에도 힘이 들면 우리 시에 있는 롯데 백화점 옥상에 올라갔다.(내가 입장할 수 있는 곳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왜 높은 곳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것들에서 혹은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들에서 멀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높은 곳에서 나의 삶의 터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물론 '미움'의 감정이 지배적이긴 하지만 꽤나 자주 '아름다움' 혹은 '경탄'의 감정을 느낀다. 

 

 조금씩 나를 좀 먹고 있는 듯한 이 도시에 나는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를 부여해서, 조금 더 열심히 살아보고자 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라도 내 삶을 정당화해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어쨌거나 봄은 왔다. 이렇게나 곱게 우리 곁에 와서는 살랑살랑 본인의 아름다움을 흔들어 댄다.

 

 

 

 

 내 기억에 사직커피는 커피 맛이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커피맛은 그저 그래서 조금은 아쉬웠다. 그래도 4천원이 안되는 가격으로 커피 한 잔 마셨으니, 그것으로 만족한다. 인왕산 넉바윈가에서 한양도성길(내부순환)로 내려오다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생각보다 서촌 중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서 놀랐다. 약간 우연찮게 발견한 곳이라.

 

 바로 옆에 대로가 있어도 코로나 때문에 지나다니는 차가 적어서 인지 고요했다. 우리는 야외 테라스에서 시시한 농담들을 주고 받았다. 그 사이에는 나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도, 우리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럴 때 나는 남자친구의 단단함을 본다. 가끔 그 밑도 끝도 없는 나 혹은 우리 사이에 대한 신뢰가 영 부담스러우면서도, 든든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럽다. 나는 늘 질문하고, 화를 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인데. 이는 내가 근본적으로 불안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반면 남자친구는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을 잘 하지 않는다. 담담하게 나의 질문에 대답하고, 기다린다. 가끔 그 기다림에 내가 다시 목이 졸리는 듯 하지만서도, 나 같은 사람이 날 쥐락펴락하는 것보단 나은 일인 것 같다.

 

벚꽃은 이미 만개를 넘어서 내년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인사하는 듯 하다

 

 

 

 조금은 실망스러웠던 디스플레이를 보여줬던 보안책방. 물론 좋은 책들, 정확히는 한국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좋은 작가들의 책들이 많이 보여서 좋았다. 다만 많은 책 진열대가 허리 밑까지 혹은 무릎 에 닿을 법한 높이였다. 그래서 책을 찾아보는 데에 여러가지 불편함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단순히 책방 디자인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실용성에서는 지나치게 떨어지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장소의 협소함 때문인지,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진열된 책이 다 떨어질 정도였다.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았던 공간.

 

 그래도 인스타에서 많이 봤던, 그 창가의 뷰는 너무 아름답더라. 지난 일요일, 그렇게 나는 서울의 봄을 한껏 만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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