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를 보았다.
"내가 두려운 게 뭔지 알아요, 로버트?" 나는 그의 손을 만지며 말했다. "나는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요." (p. 108)
10개의 단편으로 이뤄진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책과 동일한 제목을 가지고 있는 단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노교수와 여학생의 사랑이야기를 그린다. 그들 사이에 오간 스킨십이라고는 손을 잡거나(그것도 엄청 조심히), 단 한 번의 키스가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은 두 주인공 사이의 절절한 감정을 잘 그려내 내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로버트와 헤더는 서로에게 '나'라는 물질에 빛을 비춰주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사물은 빛을 만나 세상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헤더는 로버트라는 빛을만나 '나'라는 존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충실하려 한다. 그리고 '말'로는 하지 못하는 마음의 전달을 '행동'으로 해내려 한다. 헤더의 노력은 자신을 비추는 빛이 조금 더 오래 머물기를, 그래서 '온전한 나'로 살아갈 수 있는 바람이 반영된 게 아닐까.
나는 탁자에 몸을 기대고 그의 손을 잡았다. 지금도 나는 어쩌다 그런 충동이 생겨났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에게, 내가 그를, 그가 나를 생각하듯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p. 112
애초에 두 사람에게 허용된 것들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매주 한 번 로버트의 아파트에서 만나는 그 시간이 더 간절했고 열심히 서로를 비추고자 했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면서 각자가 몰랐던 부분들을 발견해 나갔다. 이를 통해 '온전히 사랑 받고자 하는 갈증'을 해소 할 수 있었다.
헤더는 스스로 로버트의 빛을 피한다. 정해진 커리큘럼을 충실히 따르는 학생 마냥 유망 전도한 의대생의 아내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때, 헤더는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그때에도, 콜린이 내게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러다보니, 나도 나 자신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p. 118
빛을 잃어버린 물질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상실한다. 물질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으니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없게 된다. 빛을 잃은 물질처럼 헤더는 무색무취의 인간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로버트의 죽음을 알게되며 아주 솔직하게 울어버린다. 이제 자신을 따스히 비춰줄 빛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헤더는 절대적인 무색무취의 인간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리적인 거리가 아무리 멀어졌어도 여전히 헤더를 비추는 로버트라는 빛은 존재했다. 헤더가 무엇보다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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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삶을 영유하기 위해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실린 10편의 단편 소설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헤더와 같은 삶을 산다.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 앞만 보고 달려가지만, 여전히 저 먼곳에서는 빛이 나를 비추고 있고 무엇보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그 빛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이 소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된다면, 그건 아마 앞 문장이 지니고 있는 인간의 아이러니를 아름답게 그러나 처연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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