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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백수린 여름의 빌라/ 차이로 가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by raumkim 2020.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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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장소를 보고도 우리의 마음을 당긴 것이 이렇게 다른데, 우리가 그 이후 함께한 날들 동안 전혀 다른 감정들을 느낀 것은 어저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요. 무(無), 당신의 집 거실에 적혀 있던 글자처럼, 사실은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그저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미욱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걸까요. (44)


 

 불통의 시대, 라고 불리고 부르며 어렵지 않게 그것을 수긍할 수 있는 때에 살아가고 있다. 예시를 들어보라고? 쉽다. 그저께와 어제를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남자친구와 핏대 올리고 싸우며 보낸 이유가 '우리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수린 작가의 "여름의 빌라"는 '왜 우리가 통하지 않는가?'하고 질문을 하기보다는 '우리는 통하지 않는다.'라며 물음표 대신 마침표로 문장을 끝낸다. 백수린 작가가 이 맥락에서 질문을 해야 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우리가 통할 수가 있나요? 우리 사이에 뭐가 있다고?" 셀 수 없는 추억의 조각들도 서로 다른 개인의 간극을 메우지는 못한다. 그것이 소설 속 주아가 오랜 독일인 친구에게 느낀 것이며, 처음 그녀는 친구에게 '당혹감'과 같은 감정을 느낀 듯 하다. 이 때의 감정을 '피로사회'의 한병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출처: 원더풀마인드

 "이 압도적인 열림의 순간은 무한자를, 하지만 후나히 공허한 무한자를 인정하라고 내게 손짓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결과는 낯설고 당혹스러운 것이었다."(에로스의 종말, 27)

 

 주아에게 베로나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주아는 베로나를 거의 다 '알고'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정의해 둔 베로나의 개념에서 벗어나는 행동이 나타나 오랜 친구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한병철 교수는 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기쁨이자 사랑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사랑이 어떻게 '내가 알고 있는 것'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타자로부터 시작된다는 건가.


 

 그런데 이내 주아는 관계를 이어주고 지속시켜주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無) 품으려는 노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2016년 12월 이후 당신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쉽게 폭력 앞에 소멸되는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고요. 하지만, 주아. 당신은 그렇게 덧붙였습니다. 긴 세월의 폭력 탓이 무너져 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54)

 

 불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 바쁘고, 힘들다. 이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뜩이나 바쁜데 나와 달라서 설득해야 하는' 타인을 있는 힘껏 미워하는 것이다. 소설 속 주아의 남편 지호가 한스에게 '개소리'라고 분노를 표출한 것도 이 때문일거다. 지호에게 한스는 국가가 제공하는 튼튼한 복지와, 세계 어디에서나 먹혀주는 흰색의 피부를 가진 우월한 사람이다. 그에 비해 자신은 초라한 비정규직이며, 살기 위해서 평온보다는 전쟁과 투쟁을 선택해야 하는 사람이다. 지호는 이러한 '차이'때문에 생긴 마음의 부아를 결국 숨기지 못한다.(소설 속 지호와 한스의 대화로도 두어시간은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베로나는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속하는 방법은 타자를 다그쳐서 나와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이치대로 흐르게 두는 것이다. 타자는 타자의 이치대로 삶을 사는 것이고, 나는 나의 이치대로 삶을 사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외면적으로든 내면적으로든 '같아지는 것'보다는 그저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애써 쳐둔 장막을 거두기만 하면 될지도 모른다. 베로나의 손녀 레오니가 다가오는 캄보디아 아이와의 사이에 그어진 선을 '지우는 것' 처럼 말이다. 

 


 

 

출처: yes24

 

 백수린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독자가 '이 상황이 왜 이렇게 됐나?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는 것에 초점을 두고 이 소설을 써 내려간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그것이 한없이 모호하게 보이길 바랬다고. 인터뷰를 읽고 소설을 다시 읽어보니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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